추리 SF판타지

방금 떠나온 세계, 김초엽 SF 소설집

책 읽는 밤 2022. 2. 8.

낯선 세계를 떠도는 우주 저편 매혹적인 이야기들

방금 떠나온 세계는

김초엽의 두 번째 소설집으로 우주 저편의 경이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은 SF소설집이다. 올 해에만 김초엽은 다섯 권의 책을 출간했다. <사이보그가 되다>(1월), <지구 끝의 온실>(8월), <방금 떠나온 세계>(10월), <행성어 사전>(11월), <므레무사>(12월)

 

김초엽 소설을 읽으면 아주 미세한 사랑의 온기가 느껴진다. 입자 같은 것, 파동 같은 같이 나를 감싼다. 김초엽에게는 우주 공간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은 외로운 떠돌이 행성이 늘 있다. 작가의 말에서 김초엽은 말한다. 여기서 손을 흔들 때 저쪽에서 안녕, 인사가 되돌아오는 몇 안되는 순간들이 있다고. 

 

작가가 구축한 그 짧은 접촉의 순간들을 <방금 떠나온 세계>에서 만나볼 수 있다. 고독하고 우울한 순간, 방금 떠나온 세계에서 보내는 신호에 운좋게도 접촉할 수 있다면, 그 순간만큼은 우리는 행복해진다.  

 

작가 김초엽은

1993년 울산에서 태어났다. 포스텍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2018년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에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방금 떠나온 세계』,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 논픽션 『사이보 그가 되다』(공저) 등이 있다.

 

작가 김초엽

2017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대상과 가작, 제43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소설 <인지 공간>으로 제11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젊은 작가상은 10년 이하의 젊은 작가들이 한 해 동안 발표한 중단편소설 중 가장 눈부신 성취를 보여준 일곱 편의 작품에 수여하는 상이다.

 

책표지

방금 떠나온 세계 수록 작품

최후의 라이오니

거주 가능한 행성이 전혀 없는 행성계의 세 번째 궤도에 홀로 떠 있던 3420ED 거주구를 주인공인 '나'가 탐사하는 이야기다. 3420ED에 거대 문명을 이룩했던 인간들은 감염병으로 모두 죽고, 3420ED의 미로 가장 안쪽에 기계들이 소박한 그들의 문명을 구축해 살고 있다.

 

주인공이 나는 기계와의 대화를 통해 3420ED이 월등한 생명공학 기술을 보유한 불멸의 도시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불멸인들은 갑작스러운 감염병 D가 창궐하여 서로 죽이기 시작하면서 3420ED를 탈출하기 시작한다. 라이오니는 불멸인의 복제 과정에서 겸함이 발생한 복제였는데, 이 결함 있는 존재인 라이오니가 기계들을 구출하고 기계들이 살 행성을 찾기 위해 어디론가 떠나간다.

 

주인공인 '나'와 불멸인 '라이오니', 그리고 기계 리더 '셀' 모두 결함이 가진 존재들이었다. 태생적 결함을 갖고 살아가지만, 주인공은 셀과의 조우에서 태생적 결함이 사실은 결함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후를 맞이하는 셀과 주인공 '나'가 마지막에 나누는 대화는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마리의 춤

마리는 모그로 태어났다. 모그는 일종의 시지각 이상증을 겪는 사람들로 현 미성년 인구의 최대 5퍼센트 정도로 추정된다. 주인공인 '나'는 그런 마리에게 춤을 가리키게 되면서 모그만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마리는 '플루이드'라는 도구를 통하여 공간상에서 몸의 위치를 인지하고 신체를 제어한다.

 

시지각이 극도로 나쁘지만 몸의 감각까지 전달할 수 있는 연결망인 플루이드를 이용해 춤도 출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모그들을 특수구역에 가두었지만 주인공인 나는 마리를 통해 모그들의 세계를 점점 이해하게 된다. 소설 <마리의 춤>에 등장하는 플루이드는 요즘 유행하는 메타버스를 떠올리게 한다.

 

로라

소설 <로라>는 인간은 고유한 신체 지도를 가진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팔과 다리를 의식하지 않을 때도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몸의 위치와 움직임을 감지하는 고유수용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잘못된 지도를 갖고 태어난 사람이 있다.

 

심한 경우에는 그 불일치가 너무 고통스러워 잘못된 지도에 몸을 맞추기 위해 팔을 자르기도 한다. 그런데 주인공의 연인 로라는 세 번째 팔이 그려진 잘못된 지도를 갖고 태어났다. 로라가 세번째 팔을 갖기 원하면서 소설 <로라>는 우리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해 SF적인 깊은 생각으로 이끈다.

 

숨 그림자

소설 <숨 그림자>는 김초엽의 첫 번째 소설집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수록된 소설 <스펙트럼>에서 그림으로 소통하는 이야기와 대비된다. 숨 그림자인들은 '입자'로 소통한다. 지구인 조안과 숨그림자인 단희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과 소통의 본질을 그렸다.

"이곳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들이 이곳을 덜 미워하게 하지는 않아. 그런 그냥 동시에 존재하는 거야. 다른 모든 것처럼"
단희는 조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단희도 숨 그림자인들을 사랑하면서 미워했다. 숨그림자를 사랑할 이유들보다 더 더 많이, 이곳을 미워할 이유들이 있었다.(182~183쪽)

 

조안은 단희를 사랑했지만 숨그림자 행성을 떠나게 된다. 머나먼 우주에서 그들의 만남과 조우는 통계가 지워버릴 수 없는 개별적인 운명의 궤적을 상상하게 만든다.

 

오래된 협약

정적이고 고요한 행성, 벨라타. 모든 것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행성. 마치 생명의 움직임이 멈춘 행성처럼. 그리고 기이한 생물 오브. 벨라타에서 가장 금기시되고, 가장 기피되는 생물. 벨라타인들은 오브 근처에 접근하거나, 손을 대거나, 훼손해서는 안된다. 

 

소설 <오래된 협약>은 벨라타를 방문하게 된 지구인 '이정'에게 벨라타인인 '노아'가 보내는 편지를 통해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지구라는 행성의 생태계를 돌아보게 만든다. 벨라타인들은 스무 살에서 스무다섯 살이 되면 모두 죽는다. 벨라타인들과 오보가 맺은 오래된 협약은 우리들의 '장수 욕망'을 성찰하도록 이끈다.

 

인지 공간은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이다. 주인공 제나는 '인지 공간' 관리자다. 이 행성에서는 열두 살이 되면 인지 공간에 들어가 공동 지식을 배우게 된다. 공동제 유지에 필요한 정보가 쌓인 인지 공간에서 사고의 방식을 바꾸는 훈련을 받기 시작하면서 유기체 뇌에 의존하지 않고 인지 공간의 개념들만 이용하여 사고하게 된다. 

 

그런데 제나의 어린 친구 '이브'는 병약한 탓에 인지 공간에 진입하지 못한다. 이브는 공동 지식보다 개별적인 인지 공간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브는 혼자 바깥 세계를 배회하다가 들짐승에게 습격당해 죽었다. 이브의 죽음을 통해 제나는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진리 못지않게 개별적인 기억 또한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캐빈 방정식

방금 떠나온 세계 수록 작품 7편 가운데 유일하게 무대가 지구다. 울산의 한 백화점 옥상에 설치된 공중관람차. 거기에 국지적 시간 거품이 발생한다는 이야기이다. 시간 거품이라니!

 

김초엽 작가의 상상력은 무궁무진하다. 주인공의 언니는 <고정된 국지적 시간 거품의 발생 조건과 존재 증명>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소설 <캐빈 방정식>은 논문과 괴담을 엮어가면서 어떤 장소에 가면 정말 시간 거품이 정말 발생할 수 있다고 상상하게 만든다. 실제로 그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