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 SF판타지

목소리를 드릴게요, 정세랑의 첫 SF 단편집

책 읽는 밤 2020. 3. 4.

1984년생인 정세랑은 판타지와 순수문학을 오가는 특이한 작가다. 2020년은 SF 단편집을 내기에 완벽한 해가 아닌가 싶었다고. 그녀가 8년 동안 썼던 SF 단편 7편을 <목소리를 드릴게요>에 엮었다. 

첫 번째 초단편 '미싱 핑거와 점핑 걸의 대모험'을 읽었을 때, 당혹감이 들었다. 작가가 도대체 뭘 말하려는지 도통 감히 잡히지도 않았고 이게 과연 소설인가도 싶었다.

그러나 인내심을 갖고 다음 단편을 읽어 나갈수록 작가가 펼쳐 놓은 세계관 속으로 푹 빠져 들고 말었다. 뭉클함은 표제작 '목소리를 드릴게요'와 마지막 수록작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에서 정점을 찍었다.

아, 이런 세계가 있었다니! 작가의 무궁무진한 상상력에 경배를 보냈다.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에서 양궁 메달리스트 정윤이 그녀에게 남겨진 마지막 화살을 승훈에게 쏘았을 때의 먹먹함이 책을 덮고 나서도 내 몸을 잔잔하게 돌고 있었다. 

짧은 연애 시절 정윤은 마음을 다 열지 못해 걸쇠를 걸어두고 장갑을 끼듯 승윤을 방어했다. 그런 정윤에게 승윤은 언제나 먼저 손을 내밀어줬고, 먼저 웃어줬다. 그런 승윤을 향해 현관문의 걸쇠를 걸어두고 시위를 당겨야 하는 정윤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했다.

"마지막까지도 이래서 미안해"

그 여운으로 '작가의 말'을 읽었다. 작가는 친절하게도 한 편 한 편에 대하여 후기를 붙여 두었다. '작가의 말' 끝부분에 이르러서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에 대한 작가의 후기를 읽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쓸 때의 기억보다 어떤 분이 웹진 거울에 "그런데 헬기가 구해주지 않고 또 통조림만 주고 가버려"하고 농담을 남기신 게 강렬했다. 그 농담만 생각하면 매번 웃음이 터진다."

작가의 후기를 읽고 그만 빵빵 터지고 말았다. 세상에, 그런 슬픈 소설을 읽고 저런 댓글을 달수 있는 내공을 가지신 분도 세상에는 있구나! 정세랑은 '사랑의 특성은 번지는 것에 있다'고 했는데, 웃음도 그런가 보다.

작가 정세랑은 극단적 환경주의자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고 했다. 단편 '7교시'는 여섯 번째 대멸종 이후 지구의 삶을 그린다. 작가는 '성차별'을 넘어서 '종차별'을 경계한다.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이제 우리와 닮은 존재가 아닌 닮지 않은 존재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할 시대에 살고 있다.

'리셋'도 그렇다. 거대한 지렁이가 인류 문명을 완전히 갈아엎은 뒤의 23세기 인류의 삶을 이야기한다. 플라스틱이 종국에는 우리를 삼켜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파되고 있다. 인류가 가진 탐욕적인 식욕과 물욕으로 인하여 인류는 파멸하고야 말 운명일지도 모른다.

<목소리를 드릴게요>의 모든 단편들에서 같은 줄거리가 느껴진다. 인간의 본성은 끝내 그렇게 운명지어진 것인가. 부자에 대한 욕망, 권력에 대한 욕망, 허세에 대한 욕망, 그 모든 욕망 앞에 너무나 폭력적이고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과연 인간의 본성일까 생각해보았지만, 모르겠다.

'목소리를 드릴게요'에서 주인공 승균은 마침내 자신의 목소리를 제거하기 위해 성대 수술을 받기로 결심한다. 누구나 승균의 목소리를 6개월 동안 들으면 살인자가 되기 때문이다. 승균의 주도하에 수용소에서 탈출시킨 연선을 만나기 위해서다. 승균도 비로소 사랑에 빠진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곧 세상을 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작가의 말처럼 이 세계가 더디지만 너무 늦지 않게 더 많은 존재들을 존엄과 존중의 테두리로 감싸 안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