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소설

가슴 뛰는 소설: 첫사랑에서 청춘의 연애, 노년의 사랑까지

책 읽는 밤 2022. 2. 16.

첫사랑부터 영원한 이별에 이르는 사랑, 가슴 뛰는 소설이 전하는 사랑 이야기

최진영, 박상영, 최민석, 이지민, 정세랑, 백수린, 권여선, 홍희정, 황정은

창비교육이 2020년 8월 발간한 가슴 뛰는 소설은 사랑을 주제로 9편의 작품을 엮어 만든 소설집입니다. 아래 목차에서 보듯 그간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소설가 9인의 작품을 모았습니다.

 

가슴 뛰는 소설에 수록된 9편의 작품 모두, 사랑과 연애에 대한 높은 수준의 문장들을 보여줍니다. 최진영 작가와 정세랑 작가의 소설은 본 블로그에서도 리뷰를 올린 바 있으니 작품 소개의 링크글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가슴 뛰는 소설은 풋풋한 첫사랑에서부터 온갖 좌절이 점철된 청춘의 사랑, 그리고 노년의 사랑까지, 우리들 삶에 찾아온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최진영의 첫사랑을 읽고 가슴이 뛰었다가 권여선의 봄밤을 지날 때쯤, 그리고 황정은의 대니 드비토에 이르면 가슴이 미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우리는 한평생을 살면서 사랑을 하고 헤어지기를 반복합니다. 그리고 이별은 대체로 영원에 이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사랑의 의미는 뭘까하고 깊은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을 빼고 나면 우리 인생은 무엇이 남는지, 가슴 뛰는 소설은 묻습니다. 책을 덮은 후, 터진 눈물샘을 다시 닫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가슴 뛰는 소설 목차

머리말 ·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최진영 · 첫사랑
박상영 · 햄릿 어떠세요?
최민석 · “괜찮아, 니 털쯤은”
이지민 ·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
정세랑 · 웨딩드레스 44
백수린 · 폭설
권여선 · 봄밤
홍희정 · 앓던 모든 것
황정은 · 대니 드비토
해설 · 사랑의 순간들 

 

부제: 사랑이 움직이는 순간

가슴 뛰는 소설 수록 작품 소개

최진영 · 첫사랑

사춘기 소녀 열아홉 살 '나'가 J에게 첫사랑에 빠져드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남자 Y로부터 사랑을 고백받고 영화도 보고 같이 시간을 보내지만 가슴은 전혀 뛰지 않습니다. 

 

반면 동성인 J를 볼 때마다 아름답고 가슴 떨리는 설렘을 느낍니다. 최진영의 첫사랑은 사랑이 성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 떨리는 대상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도 나는 첫사랑의 원형을 그리워합니다.

 

작가 최진영의 첫사랑은 문장이 찰지고 매끄럽습니다. 아, 소설가의 문장이란 이런 것이구나를 느끼게 됩니다. 최진영의 소설 <구의 증명>도 추천합니다.

 

최진영 '구의 증명' 슬픔마저 뛰어넘는 지독한 사랑

최진영 작가의 '구의 증명'(2015)은 은행나무 노벨라 시리즈의 일곱 번째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세 번째로 접하는 노벨라 시리즈네요. 황현진 작가의 '달의 의지'와 이영훈 작가의 '연애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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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영 · 햄릿 어떠세요?

주인공인 '나'는 청당돔 걸 그룹 연습생이었으나, 치열한 경쟁에서 탈락하고 다시 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바닷가 소도시 출신의 촌뜨기 '곰곰'을 만나 동거를 하고 연애를 하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나는 절망감 속에서 곰곰과 동거를 시작하고 불안함 속에서도 연애를 이어갑니다. <햄릿 어떠세요?>는 개인이 대체 가능한 부품 같은 존재로 전락한 경쟁사회에서 사랑의 힘을 깨닫게 하는 소설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인 나 역시 희망을 잃지 않고 무던하게 살아가는 곰곰을 보며 성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최민석 · “괜찮아, 니 털 쯤은”

가슴 뛰는 소설에서 존나 웃기는 소설은 단연, "괜찮아, 니 털쯤" 입니다. 최민석의 초단편집 <미시시피 모기떼의 역습>처럼 이 소설 또한 타고난 이야기꾼으로서의 입담이 빛나는 작품입니다.

 

주인공인 나는 유감스럽게도 점점 퇴화하여 원숭이가 되어가는 중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습니다. 영화 <맨 인 블랙>의 외계인 설정을 패러디한 것 같기도 한 배꼽 잡는 이야기는 직접 읽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주인공인 나는 원숭이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털을 깎는 수고를 겪어야 하는데······. 황당한 이야기이지만 연애에 대처하는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긍정적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창비 제공

이지민 ·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

나는 모든 여성의 이상형에 가까운 그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데이트를 하지만, 어느 날 그는 나에게 다른 여자와의 결혼식을 통보합니다. 나는 혼자 그를 사랑했던 것이고 그에게 나는 그냥 편한 여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내게는 시발놈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다른 여자와 헤어지고 손에 깁스를 하고 나타났을 때 나는 그를 집에 바래다주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한심한 연애를 한다고 나를 비난합니다. 위트 넘치는 글은 오래된 사랑의 방식을 재검토하도록 이끕니다.

 

정세랑 · 웨딩드레스 44

정세랑의 <웨딩드레스 44>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한 여성 44명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지금은 비혼주의가 대세가 되어가고 있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결혼은 우리 사회가 강제하는 의무였습니다. <웨딩드레스44>는 정세랑 작가다운 시선이 다양한 각도로 묻어있는 소설입니다. 

 

정세랑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 근대사의 매력적인 캐릭터 심시선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는 그간 읽었던 정세랑의 소설들과는 결이 조금 달랐다. 정세랑의 첫 SF 단편집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읽고 그녀의 소설에 빠져들었고 <지구에서 한아뿐>을 읽으면서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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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드릴게요, 정세랑의 첫 SF 단편집

1984년생인 정세랑은 판타지와 순수문학을 오가는 특이한 작가다. 2020년은 SF 단편집을 내기에 완벽한 해가 아닌가 싶었다고. 그녀가 8년 동안 썼던 SF 단편 7편을 <목소리를 드릴게요>에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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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 · 폭설

백수린의 <폭설>은 사춘기 소녀인 내가 아빠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재혼한 엄마를 바라보며 성숙해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린 소설입니다. 

 

요즘은 이혼이 흔하지만 불과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이혼녀는 사회의 부당한 낙인을 감내하고 살아야 했습니다. 남편을 버린 여자 혹은 불륜, 혹은 가정을 내팽개친 여자로 말입니다. 모든 사건에는 이면이 있음을, 작자의 인생은 각자가 선택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전해주는 소설입니다.

 

권여선 · 봄밤

돌싱글즈의 이야기를 다룬 권여선의 봄밤은 가슴 뛰는 소설에서 유일한 3인칭 소설입니다. 3인칭임에도 1인칭 못지않게 몰입도가 높습니다.

 

'영경'은 남편과 이혼하고 딸까지 빼앗긴 후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국어교사마저 관두게 됩니다. '수환' 역시 이혼 후 신용 불용자로 고생을 하다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게 됩니다.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는 중년의 두 남녀가 재혼하여 생의 마지막까지 견뎌낸 사랑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간혹 인터넷에 보면 '나'로 이야기를 시작했다가 제일 끝 문장에 '이것은 소설입니다'라는 초딩같은 장난을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유치한 글에도 애써 공감을 보내는 이유는 글쓴이가 겪었을 아픔을 토닥거려 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설 <봄밤>은 위장된 1인칭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고한 사랑의 경지를 우리 앞에 펼쳐 보입니다.   

 

창비 제공

홍희정 · 앓던 모든 것

주인공인 나는 일흔셋 할머니로 오갈 데 없는 스물하나 청년 윤오와 동거를 시작하게 됩니다. 나는 윤오를 좋아하면서 생각의 변화를 많이 겪습니다. 사랑에는 국경만 없는 것이 아니라 나이도 없다는 걸 <앓던 모든 것>은 이야기합니다. 나는 윤오를 만나 청년 윤오를 앓게 됩니다. 

"지금 하려는 거 하지 마."(할머니)
"지금 하려는 게 먼데요."(윤오)
"모르는 척하지 마."(할머니)

 

황정은 · 대니 드비토

주인공인 '나'는 펭귄맨이었던 배우의 이름이 뭐였더라, 하고 생각한 순간,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주인공인 나는 원령인 셈이지요.

 

나는 죽고 나서도 남편 유도에 달라붙어 그가 죽어 원령으로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다리며 무료한 남편의 일상을 지켜봅니다. 유도가 재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자라 결혼을 하게 되고, 그녀의 엄마가 죽을 때까지. 그리고 원령인 나조차도 세월이 너무나 많이 흐른 탓에 거의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도가 시설에서 죽어갈 때까지 기나긴 세월 동안 지켜보기만 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죽어서도 남을 쓸쓸함이라면 덧없는 것만 못하다는 남편의 말처럼, 이제 나는 남편이 죽어서도 나와 같은 쓸쓸함을 겪지 않도록 유도 씨가 죽은 후에 원령으로 남지 않고 덧없이 사라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그저 바랄 뿐이었다. 유도 씨가 죽은 직후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유도 씨가 죽고 난 다음엔 무엇으로도 남지 않기를.
말끔히 사라질 수 있기를.
사라져 버리기를.
부디.
부디.
대니 드비토.

황정은 작가의 <대니 드비토>는 한 편의 시처럼 읽히는 소설입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한 어마어마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슴 뛰는 소설 독후감

사랑을 주제로 9편의 소설을 엮은 엔솔러지는 우리 인생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질량을 가늠해보게 합니다. 사랑은 아주 무겁기도 하고, 한없이 가볍기도 합니다. 사랑은 밥을 짓고 요리를 하는 것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 중에는 사랑이라는 입자가 있어서 우리가 방심하는 순간, 훅 들어오기도 하고, 갑자기 사라져 버리기도 하는 것은 아닐까요?

 

산소 없이 살 수 없듯 사랑 없이도 살기 어려운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생각. 가슴 뛰는 소설은 그런 점에서 귀하게 다가오는 소설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