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소설

정세랑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 근대사의 매력적인 캐릭터 심시선

책 읽는 밤 2021. 3. 1.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는 그간 읽었던 정세랑의 소설들과는 결이 조금 달랐다. 정세랑의 첫 SF 단편집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읽고 그녀의 소설에 빠져들었고 <지구에서 한아뿐>을 읽으면서 열렬한 독자가 되었다.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는 심시선이라는 할머니와 그 딸들, 손녀들의 이야기이다. 심시선에게는 물론 아들과 손자가 있고 사위가 있으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곁가지로 다룬다. 소설가 정세랑은 모계사회를 많이 그리워했던 모양이다.

 

첫 장에 심시선 가계도가 그려져 있는데, 등장인물만 해도 17명이다. 가계도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까지 치면 족히 스무 명은 넘을 것 같다. 한 권의 소설에 담기에는 등장인물이 지나치게 많은 것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시선으로부터>를 읽어 나갈수록 '귀엽고 웃기는 소재를 충분히 귀엽고 웃기게 쓰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넓고 깊은 성찰을 푹푹 찔러넣는 정세랑 작가의 솜씨는 이제 불가사의한 경지에 올랐다'는 작가 김하나의 평이 결코 공치사가 아니구나 생각하며 소설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소설의 첫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진행자 심시선씨, 유일하게 제사 문화에 강경한 반대 발언을 하고 계신데요. 본인 사후에도 그럼 제사를 거부하실 건가요?

 

이 문장 뒤로 진행자와 심시선이 주고받은 대화가 쭉 인용되고 마지막엔 출처가 명시되어 있다. 위 녹취록은 "-TV토론 '21세기를 예상하다'(1991)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힌다. 

 

그렇다. 소설 <시선으로부터>는 꼭지마다 이렇게 심시선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강연록이나 기고글, 대담글, 일기글 등이 인용되고 다음 단락부터는 소설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심시선은 한국 전쟁통에 살기 위해 하와이로 이민을 갔고 거기서 독일인들이 사랑하는 화가 마티아스를 만난다. 그를 따라 독일 뒤셀도르프로 가서 그림을 배웠고 학위도 땄다. 그러나 마티아스가 자살을 하는 바람에 심시선은 독일인들이 사랑하는 화가를 파멸시킨 요부로 치부되었다. 

 

그 후 심시선은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되고 한국으로 돌아와 요제프 리와 결혼하여 딸 명혜와 명은을 낳고 아들 명준을 낳고 평론가로 살아간다. 그리고 경아라는 딸을 가진 홍낙환과 두 번째 결혼을 한다. 

 

소설 중반부까지는 <시선으로부터>는 정말 묵직하고 깊은 성찰이 빛나는 작품이라고 감탄하며 읽었다. 1984년생인 작가가 어떻게 이토록 삶의 깊은 성찰에까지 깊숙이 내려갈 수가 있었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소설은 진부해졌다. 정세랑의 트레이드 마크인 페미니즘과 극단적 환경주의가 베이스로 깔리며 늘어진 테이프가 되고 말았다.

 

정세랑의 페미니즘은 어쩐지 여성을 태생적으로 약한 존재로만 상정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정세랑의 환경주의도 그렇다. 어느 한쪽만 집요하게 들여다보아 균형감각을 상실한 것 같아 짠하다.

 

<시선으로부터>의 큰 줄거리는 이거다. 큰딸 명혜가 심시선의 10주기를 맞아 가족들과 함께 화와이에서 제사를 딱 한번 지내기로 한다는 것. 딸들이 제사를 준비하는 이야기가 전부이니 늘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처음 받았던 심시선이라는 인물에 대한 강렬한 인상은 첫 문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제사를 사라져야 할 관습이라고 1991년도에 생각했던 인물이었니까. 제사만큼 비합리적이고 미개한 관습이 또 어디 있을까 늘 생각해 왔으므로 심시선이라는 캐릭터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소설 후반부에서 그 매력적인 캐릭터가 이렇게 바뀌어져 있는 걸 보고 혀를 내둘렀다. 

"그 땅에 첨단산업단지가 들어설 계획이라고 들었다. 수십 명이 묻힌 땅을 그대로 밀어버린다면 이 나라에 미래가 있을 것인가? 기억하지 않고 나아가는 공동체는 본 적이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몇 통의 진정서를 쓰는 새벽이면 자꾸 엄마의 비녀가 떠오른다." - 잃은 것들과 얻은 것들(1993)에서(298쪽)

 

이 얼마나 해괴한 논리인지 모르겠다. 무덤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도 제사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발상이다. 묘지가 없다면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려버린다는 뜻인가? 무덤을 통하지 않고는 선조를 기억하는 방법이 없다는 말일까?

 

우리나라는 풍광이 아름다운 곳에는 꼭 묘지가 있어 눈쌀이 절로 찌푸려진다. 환경을 살리자면 먼저 이 땅에서 수많은 묘지부터 걷어내야 하지 않을까. <시선으로부터>는 처음 강렬했던 인상과는 달리 산천이 아름다운 길목을 배회하다 꼭 묘지를 만난 기분이 드는 소설이다. 

 

그럼에도 소설가로서 심시선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창조해낸 것에는 박수를 보낸다. <시선으로부터>가 절반의 분량이었다면 훨씬 매력적인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한 인물을 한 권에 걸쳐서 추억만 하다 보니 심시선이 본의 아니게 그 가족의 교주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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